

두 번째로 읽은 P.D. 제임스 책이다. 사진 순서대로 여자에게 어울리지 않는 직업이 시리즈 첫 번째고, 피부 밑 두개골이 시리즈의 마지막이자 두 번째 소설이다.
이야기는 주인공인 코델리아 그레이의 동업자, 버니 프라이드가 자살하면서 시작한다.
전직 경찰 출신인 그는 코델리아에게 잘 곳을 제공해주고 수사 지식이나 노하우를 전수해주며 동업을 제안한, 어찌보면 코델리아가 믿는 단 하나의 친구였다. 그런 그가 암 말기 판정을 받고 치료를 거부한 뒤 사무실에서 손목을 그은 채 자살했다. 영리하게도 아스피린을 잔뜩 먹고 손목을 물에 담근 채였다. 주인공은 버니가 스스로 목숨을 끊은 현장을 보며 경찰 시절 과다출혈을 기대하며 자살기도 했으나 혈액 응고로 실패해 더 큰 고통을 겪는 걸 보았다는 그의 이야기를 떠올린다.
버니의 유품을 정리하고 그의 경제상황을 확인하고 적당히 장례를 치르면서 눈물 한 방울 안 흘리던 코델리아는 동료가 입이 마르도록 칭찬하고 존경하던 상사, 달글리시 경감이 장례에 참석조차 안 했다는 사실에 분노하면서 비로소 눈물을 흘린다. 나는 아마 이때부터 주인공에게 사랑에 빠졌던 거같다. 코델리아는 세상이 얼마나 불합리하고 비논리적이고 불공평하고 비열한지 누구보다 잘 알고 선을 행했을 때 따라오는 모욕과 지탄, 고통을 안다. 그럼에도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면 그렇게 행동한다, 그 선택이 앞으로 얼마나 자신을 괴롭힐지 알고 그것에 두려워하면서도 말이다. 사람들 사이에서 한 발 떨어저서 냉정한 시선으로 그들을 재단하는 것같지만 결국 사람을 위하는 선택을 하는 코델리아가 정말 좋다.
그래서 결론은 뭐냐면, 왜 두 권밖에 없냐는 거다. 왜...
피부 밑 두개골을 읽을 때는 페이지수를 계속 확인하면서 읽었다. 지금 이러면 안 되는데? 하면서... 분명 뒤에 뭐가 더 있을 게 분명한데 이렇게 끝난다니 믿을 수가 없다. 그럴거면 왜 그 소시오패스 경사를 그렇게 공들여 설정하고 묘사했으며 그로건 경감이 은근슬쩍 달글리시 이야기(뒷담화)를 하게 만든 거지? 이 세 사람, 더 나아가서는 네 사람이 분명 뒤에 엠브로즈와 법정에서 얽히고 설킬 텐데. 작가의 머리 속에선 이미 무언가 일이 일어났을 텐데 왜 저한텐 안 알려주시는 거죠?
1. 여자에게 어울리지 않는 직업에서 코델리아와 소피의 대화가 기억에 남는다. 육체 관계와 외로움, 사랑에 관한 이야기인데 그 내용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이런 이야기가 아니다. 20년에 태어난 작가(정말 딱 1920년에 태어나심)가 1970년대에 발표한 소설에 쓴 내용이라고 믿기 힘든 생각이어서 충격이었다. 이 땅에 태어난 수많은 사람들이 얼마나 늦게 생각하고 늦게 말할 수 있었는지 서글퍼졌다.
2. 데이비랑 휴고가 정말 그린듯한... 정말 어떤 인간상이라 읽으면서 소름이 돋았다. 저런 사람은 어느 세대에나 존재했구나 싶어서 말이다. 솔직히 말하자면 읽다가 책에 중지 몇 번 날렸다. 너무 짜증나서...
3. 하지만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가 아니던가? 그게 그녀를 살인자로 여길 이유는 못되었다. 그녀와 조지 경이 한 쌍이라는 생각은 터무니없고 역겨웠다. 경감은 아직 중년과 노년이 스스로를 속이는 그 애처롭고 케케묵은 거짓말, 젊은 사람도 그들에게 육체적인 매력을 느낀다는 그 거짓말을 믿기 시작할 나이는 아니지 않나? 그 늙은 염소들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곤 그저 돈과 권력과 명성으로 젊음과 섹스를 사는 것이라고 그는 속으로 뇌까렸다.
4. 코델리아는 그 6월을 생각했다. 동지들을 위해 요리를 하고, 동지들을 위해 장을 보고, 때로 위험을 무릅쓰고 메시지를 전달하고, 방을 구하고, 집주인과 상점 주인을 달래고, 동지들을 위해 바느질도 했던 그 반년이라는 시간을. 동지들과 아버지는 머리로는 남녀평등을 믿었지만, 자신들이 직접 기본적인 가사노동 기술을 습득하려는 수고를 기울이지 않는다면 그 평등을 실현되지 않는다는 사실은 굳이 생각하지 않았다. 그리고 아버지가 딸을 수녀원에서 데려와 케임브리지 진학을 불가능하게 한 것도 불안정한 떠돌이 생활 때문이었다.
딸에게는 고등교육을 시킬 필요가 없다는 아버지때문에 대학 진학을 포기해야만 했던 작가는 가난한 아버지와 죽을 때까지 정신병에 시달린 남편을 대신해 고등학교 졸업 이후 평생 가장으로 일해야만 했다. 작가가 만들어낸 주인공 코델리아 그레이 역시 태어나면서 어머니를 잃고 파시스트로 유럽 대륙을 떠돈 아버지 때문에 위탁가정을 전전하다 수녀원에 들어가게 된다. 행정 처리자의 순간의 실수가 코델리아 평생을 바꾼 셈이다. 코델리아는 수녀원에서 단순히 읽고 쓰는 법을 배우고 에이레벨 테스트를 준비한 게 아니었다. 대학을 졸업한 수녀님을 만나 지식에 대한 갈망, 스스로 갈증을 해결하기 위한 탐구 정신을 배운다. 케임브리지 전액 장학금을 목표로 구체적이진 않지만 앎과 배움으로 가득했을 계획은 마음껏 부릴 사람이 하나 필요했던 아버지덕에 산산조각이 난다.
그런 면에서 작가와 코델리아는 같은 부분을 공유한다. 그래서 코델리아가 케임브리지를 마음껏 누비며 지상에서 가장 아름다고 지식으로 가득 찬 도시라고 평가할 때, 나는 이 장면을 묘사함으로써 작가가 스스로를 위로한다는 느낌을 받았다. 하지만 주의해야 할 게 여기서 자기연민은 없다는 점이다. 내 안에서 코델리아 그레이라는 인물은 햇살로 가득찬 대학도시에서 풍광을 즐기면서 누군가는 들으면서 눈물을 흘릴만한 과거를 떠올리다가도 갈 시간이 되면 자리를 털고 일어나서 탐정 일을 하러 가는 사람일 것이다.
5. 갑자기 신성한 느낌이 들었다. 경찰은 자신만의 결정을 내려야 할 것이다. 그녀는 이미 그녀의 결정을 내렸다. 망설임도 괴로움도 없었다. 그녀는 진실을 말할 것이고 보란 듯이 살아남을 것이다. 그 무엇도 그녀를 건드릴 수 없다.